Fernando 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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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소르(1778~1839)는 스페인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입니다. 기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오페라, 오케스트라, 현악 사중주, 피아노, 가곡 발레 등 다양한 장르의 곡을 썼습니다. 그의 발레곡 ‘Cendrillon’은 백번이 넘는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소르의 기타곡은 쉬운 소품으로부터 ‘마술피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같은 대곡에 이르기까지 난이도가 다양합니다. 그는 당시에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여겨졌고 소르의 작품도 널리 출판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현대의 기타리스트들이 오른손 약지손가락을 비중있게 사용하는데 비해 소르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주법도 지두탄현을 했습니다.

소르의 악보집이 여러 나라에 걸쳐 출판되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도 다양하게 번역이 되었는데. Joseph Fernando Sors, Fernando Sor, Ferran Sor, Ferdinand Sor, Ferdinando Sor 등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대대로 군인 집안이었던 바르셀로나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소르는 선조들처럼 군인이 되려고 하였지만 아버지가 소르에게 이태리 오페라를 들려주고 나서는 음악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오페라 뿐 아니라 기타를 처음 접하게 된 것도 아버지 덕분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소르의 부모님은 그가 라틴어 공부를 소홀히 할까봐 음악에 너무 집중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11살이었던 어린 소르는 라틴어로 노래를 써서 부모님의 마음을 얻어보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음악 교육을 정식으로 받기 전에는, 자기만의 기보법을 사용해서 악보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12살이 되었을 때 바르셀로나 대성당 주교회에서는 소르의 재능을 알아보고 거기서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학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시기에 산타 마리아라는 유명한 수도원에 ‘조셉 아레돈도’가 새 수도원장으로 부임하였는데 소르의 재능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수도원 내에 있는 성가대 학교에서 배울 수 있도록 학비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소르는 말년에 이 시기를 그리워하고 추억하며 글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소르가 대대로 이어진 군인의 길을 가지 않고 자기 말 보다는 친구들의 말을 더 따르는 것이 속상해서 소르를 수도원의 학교에서 빼내어 군인학교로 보냈습니다. 거기에서 4년간 있었는데 다행히도 인생의 안 좋은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작곡할 수 있는 자유시간이 많이 있었고 또 군대음악을 작곡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1808년에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하자 소르는 애국적인 노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군악대에 소속되어 길에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코르도바에서 대위로 승진하였는데 당시에 프랑스와 전투에도 몇 번 참가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스페인 군대가 패배하자 소르는 프랑스 식민 정부의 간부급 공무원직을 수락했습니다. 프랑스 혁명 사상을 취하기 위해 조국의 안보를 포기했던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소르는 계몽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었습니다. 1813년 스페인이 프랑스를 내몰자 소르와 다른 계몽주의자들은 처벌이 두려워 스페인을 떠났습니다. 소르는 파리로 떠났고 그 뒤로 고국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대대로 이어져 오던 군인이 되길 포기하고 공무원직도 내려놓은 소르는 프랑스에서 음악에 집중하였습니다. 기타리스트로는 처음으로 비르투오조로 명성을 얻었는데 오페라를 썼을 때는 프랑스인들의 인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소르의 작품번호 7번은 길고 보표가 3단인 이상한 곡이었는데 다른 기타리스트들은 아무도 칠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음악활동이 더 이상 인기를 얻지 못하자 1815년에 런던으로 이사했습니다. 거기서 또 열심히 한 결과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되었고 기타레슨 뿐 아니라 성악 레슨도 했습니다. 런던에서는 오페라보다 발레가 유명했기 때문에 소르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였고 Cendrillon이라는 작품으로 나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런던에서 어느정도 업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소르는 1823년에 수석 발레리나를 꿈꾸는 펠리시테 헐렌을 따라 모스크바로 갔습니다. 이 시기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의 로맨틱하고 프로페셔널한 일상이 과장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지낸 지 3년 후에 소르는 유럽 전역에 공연 투어를 다녔고 가는 곳마다 현지 음악인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느꼈던 1827년에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남은 인생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한 곳에 정착한 계기로 소르는 많은 작품을 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중이 좋아할 만한 곡, 그리고 다른 기타리스트들이 칠 수 있을 정도의 쉬운 난이도의 곡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약 10년 동안 소르의 말년에 출판된 악보집을 보면 그런 고충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작품번호 43번은 Mes Ennuis라는 제목이 붙었는데 ‘나의 골칫거리들’이라는 뜻이고 여섯개의 발레곡는 ‘아무나 원하는 사람들’에게 헌정한다고 썼습니다. 이런 비꼬는 문구들은 판매 실적에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작품번호 45번에 붙은 서두는 더 심각한데, “이것은 여섯 개의 짧고 쉬운 소품으로 작곡했지만 실제로 쳐보면 아마 어려울 것이다. 인내심이 거의 없는 사람들을 위해, 페르난도 소르 작곡.”

마지막 작품을 1837년에 먼저 사망한 그의 딸을 추도하기 위해 작곡하였습니다. 안그래도 몸이 아팠던 소르는 딸이 사망한 일로 인해서 우울증까지 겹쳤고, 1839년 61세에 혀와 목구멍의 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위키피디아, 번역:최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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